회현마을

회현마을을 소개합니다

가락국의 로미오와 줄리엣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봉황대(鳳凰臺)는 김해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구릉으로, 동남쪽으로는 회현리 패총이 있는 구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가라대(伽羅臺), 망해대(望海臺), 여의현(如意峴), 독현(獨峴), 회현(會峴)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봉황대라는 이름은 조선 고종 초의 부사 정현석(鄭顯奭)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봉황대는 인근에 패총과 주거지 등 가락국 당시의 다양한 유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1975년에는 출여의낭자(出如意娘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여의각(如意閣)이 세워졌는데 매년 여의제(如意祭)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락국 제 9대 겸지왕(肅王) 때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현 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습니다.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龜川)에서 멱을 감게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습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오게 되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습니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당한 여의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편 유민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林虎山)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이라고 불리는 돌문이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인 여의좌(如意座), 그리고 망견대(望見臺), 여의목(如意木), 황세목(黃洗木), 소변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김해 가락국의 건국 신화 수로왕탄강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부족장을 기다리는 구야국의 9명의 간(干)들이 지도자들에게 "너희의 왕을 내려 보낸다"는 계시와 함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부족장들은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부족 주민들의 수가 늘어나 노래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황금색 알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부족장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최초 다문화여성 허황후 수로왕비설화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월지국)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남방(南方)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설화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