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
- 분류 : 사적 제2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 시대 : 가야시대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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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더미로서, 1920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발굴 조사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구 문화재자료 제87호)가 합쳐져 2001. 2. 5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유적이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 9~22)의 '화천' 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에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수로왕릉(首露王陵)
- 분류 : 사적 제73호
- 소재지 : 김해시 회현동(서상동) 312
- 시대 : 삼국시대
- 규격 : 면적61.75㎢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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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 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써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년)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상동고인돌
- 분류 : 고인돌,기념물 제4호
- 소재지 : 김해시 서상동 6-7
- 시대 : 청동기
- 규격 : 길이 460cm, 폭 260cm, 두께 115~140cm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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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 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써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년)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
- 소재지 : 김해시 회현동(서상동) 6-6
- 시대 : 조선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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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때 사충신(四忠臣)의 한사람인 청주 송씨 송빈(宋賓)이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바위이다.
그의 얼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64년에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이라 새긴 비를 바위 위에 세웠다.
원래 이 바위는 고인돌의 상석이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金海 會峴里 貝塚)
- 분류 : 조개더미(사적제2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253
- 시대 : 원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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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은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이 7m, 동서 길이 약 130m, 남북 너비 약 30m의 낮은 구릉위에 형성된 조개더미로 남부지방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1907년에 발견되어 1920년에 1차 발굴되었고 이 당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회현리 조개더미로 명명되었다.
1992년에 회현리 조개더미가 있는 봉황대(鳳凰臺) 주변에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1920년 발굴을 통해 왕망(王莽)의 화천(貨泉)과 탄화미가 발견되었다.
왕망의 화천은 중국 전한과 후한 사이의 신대 (新代)에 사용되었던 화폐로,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 후한 시기까지 올려보고 있다.
최근 회청색연질토기(灰靑色軟質土器)시대의 설정을 주장하는 논리와 함께 이 유적의 상한연대를 3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 발견된 탄화미는 고대미 (古代米) 연구의 중요자료로서 우리나라의 도작사(稻作史)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34년의 조사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석관묘(石棺墓), 옹관묘(饔棺墓) 등이 발견되어 조개더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인돌 및 석관묘 유구와 그 이후의 원삼국시대 조개더미가 종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발견된 왕망의 화천과 김해식 옹관은 이 지역이 원삼국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준다.
1992-1993년에 실시된 봉황대 일원에 대한 조사 에서는 조개더미와 주거지, 폐기장, 유물포함층 등이 확인되었는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확인된 조개더미는 A.D. 3~6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군집을 이루는 주거지는 3-6세기대의 장기간에 걸쳐 축조된 것이다.
유적의 규모는 5,098㎢ 이다.
※ 사적 제2호
봉황대(鳳凰臺)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153
- 시대 : 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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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로 회현리 패총과 합쳐져 2001년 2월 5일 사적 제2호로 확대 지정된 유적(구 문화재 자료 제87호)으로 남아있는 유구는 없으며 조선 후기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다고 하여 자연암반에 ''鳳凰臺''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수로왕릉내 고인돌(首露王陵內 支石墓)
- 분류 : 고인돌
- 소재지 : 김해시 서상동 312
- 시대 : 청동기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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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현재 수로왕릉 경내에 있다.
이 고인돌은 해반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지봉 고인돌, 서상동 고인돌, 내동 고인돌과 같은 성격의 유적으로 보이며 현재는 2기가 남아 있다.
하부구조는 현재 상석이 이동되거나 땅속에 묻혀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기한 유적들의 경우를 참고한다면 지하에 석곽을 가진 기반식으로 추정된다.
상석의 크기 : 남쪽 고인돌 180×140×80cm, 북쪽 고인돌 400×260×145cm(사진자료 : 남쪽 고인돌)
봉황동조개더미 ① (鳳凰臺 貝塚①)
- 분류 : 조개더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401
- 시대 : 원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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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鳳凰臺)의 북쪽 기슭에 민가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하의 패각이 노출되어 발견된 것이다.
도로개설 당시 채집된 유물에 의하면 인접한 회현동조개더미와 동일 문화양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김해식토기라고 부르는 회청색 연ㆍ경질토기편과 적갈색 연ㆍ경질토기편, 그리고 방추차, 어망추, 녹각재도자병, 토재곡옥, 소도자,탄화미, 복골편(鹿角製刀子柄, 土製曲玉, 小刀子, 炭火米, 卜骨片)등이 그러하다.
패각의 퇴적층위는 주로 백합 껍질로 단순층으로 여겨지며 두께는 약 1.5m 정도이다.
규모는 확실치 않으나 소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출토된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2-3세기경에 해당된다.
봉황동조개더미 ② (鳳凰臺 貝塚②)
- 분류 : 조개더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360
- 시대 : 원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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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鳳凰臺)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현재 패각 상부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노출된 부분은 얼마되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표토층에서 채집된 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과 백합 껍질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유물은 주로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는데 내용은 봉황동조개더미①과 동일하다.
이 조개더미의 형성 시기 역시 2~3세기로 추정된다.
봉황동조개더미③(鳳凰臺 貝塚③)
- 분류 : 조개더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336, 337
- 시대 : 원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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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지이기 때문에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본래는 패각을 봉황대가 있는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을 향해 버린 듯하나 정상부의 경사가 심해 중간 부분에서 퇴적되었다.
채집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껍질이 대부분이며, 토기편은 봉황동 조개더미①②와 같다.
그리고 간혹 기와편도 흩어져 있어 조개 더미 퇴적 이후 이 일대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남아있는 패각층 출토의 토기 특징으로 보아 2~3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봉황동조개더미④(鳳凰臺 貝塚④)
- 분류 : 조개더미
- 소재지 : 김해시 봉황동 140,144
- 시대 : 원삼국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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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 남쪽 경사면 기슭의 봉황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축 당시 많은 패각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 패각층이 남아 있는 부분은 구.봉황초등학교 건물 서쪽 끝의 뒷편 언덕과 그 주위이며, 그 규모는 인접한 회현리 조개더미와 거의 비슷하다.
이곳에서 채집된 자료는 대부분 굴껍데기와 봉황동 조개더미①②③과 동일한 토기편들인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봉황동 일대는 중간에 우뚝 솟은 봉황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조개더미가 무질서하게 분포되어 있어 가락국 (駕洛國) 초기에 이곳이 생활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